아이의 믿음이 사라지다
어릴 적 내가 학교 다닐 때는 알림장 노트에 준비물이나 숙제 등을 적어왔었다. 세월이 흘러 요즘은 학교 종이라는 앱을 통해 담임 선생님이 학교 소식이나 알림장을 보내 주신다. 학교 종이 앱은 학생, 학부모 모두 접속할 수 있다. 1주일 전 담임 선생님이 교감 선생님으로 승진해서 가시고 젊은 담임 선생님이 새로 오셨다. 이번 담임 선생님은 알림장 마지막에 간단히 미션을 올리셨다.
그날도 확인하니 ‘내가 중요시하는 삶의 가치 2가지를 댓글로 알려주세요.’라고 적혀있었다. 댓글에서는 학생 OOO, 학생 OOO의 보호자로 댓글이 여러 개 달려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갑자기 내 머릿속에서 ‘어, 보호자도 적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그렇게 생각하고 아이랑 저녁을 같이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자기 전 아이에게 내가 중요시하는 삶의 가치 2가지 댓글 다는 거 엄마도 적는 거냐고 물어보려는 데 아이가 잠들어 버렸다.
아침이 되었다. 밖에 비가 주룩주룩 오고 있었다. 따끈한 떡국 한 그릇이랑 신김치를 아침으로 준비했다. 방으로 아이를 깨우러 들어가려고 하는 데 순간 뭔가 홀린 것처럼 아이를 깨우기 전에 학교 종이에 댓글을 달아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댓글을 보니 다른 부모들도 OOO의 보호자로 댓글이 달려있었다. 그래서 나도 나의 삶의 가치로 생각하는 건강과 행복을 댓글로 달고 아이를 깨우러 갔다.
평소 같으면 일어나는 데 한참이 걸리는 아이인 데 오늘은 웬일인지 한 번 만에 벌떡 일어났다. 멍하게 앉아있는 아이에게 말했다.
“엄마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의 가치는 건강과 행복이야. 그렇게 댓글 달았어.”
이 말을 듣는 순간 아이는 불같이 화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가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엄마 바보야, 그거 댓글 내가 다는 거라고. 얼른 지워.”
아이가 소리 지르는 순간 뭔가 잘못된 걸 감지했다. 난 갑자기 마음이 급해져서 생각과 다른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네가 쓰는 거면 엄마가 쓴 거 지우고 네가 다시 쓰면 되잖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는 더 크게 울어버렸다. 정말 집이 떠나가도록 목청을 높여 울어댔다.
내 마음에는 이게 이렇게 심각하게 울며 화낼 일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런데 울음을 그치기는커녕 더 크게 동네 떠나가듯이 울어버렸다. 아이가 울 때 달래는 거보다는 실컷 울게 놔두자 싶어 한 5분 정도 혼자 두니 울음을 그치고 나에게 쫓아왔다.
“엄마, 내가 이번 일로만 분노하고 눈물이 난 줄 알아? 이번 것 그래 좋다. 엄마가 모르고 댓글 달았다 치자. 그런데 민아 휴대폰 답장 사건, 내 그림 수정 사건, 더 얘기할까? 이런 게 쌓여서 난 엄마가 내 것에 손대는 게 너무 싫고 속상해. 점점 믿음이 사라져가. 제발 내 것에 손대지 마. 내 삶의 중요한 가치가 뭔 줄 알아? 믿음과 용기야. 엄마는 나에게 믿음을 잃었어.”
분노에 찬 눈으로 나를 보고 울부짖으며 말을 쏟아부었다. 난 할 말이 사실 없었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거밖에 할 게 없었다.
민아 휴대폰 답장 사건은 2년 전 일이다. 내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인 자녀 휴대폰 훔쳐보기를 하다 아이에게 들킨 사건이다. 그 당시 지인의 아이가 나쁜 친구를 만나 학교를 그만두는 사건이 발생한 해였다. 그 얘기를 듣고 아이의 주변 친구들에 대해 궁금해졌다.
그래서 나도 아이의 생활을 알아보고 미리 나쁜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예방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친구를 만나는지 알아보기로 결심했다. 회사에 다니는 내가 아이의 친구 관계를 깊이 알 수 있는 방법은 휴대폰 밖에 없었다. 아이가 그 당시까지만 해도 휴대폰에 잠금이나 비번 설정을 하지 않고 오픈해 놓은 상태였다.
난 손쉽게 아이의 휴대폰에 접근할 수 있었다. 난 아이의 보호자고 나쁜 일들을 막기 위해 하는 행동이라고 휴대폰 훔쳐보기를 스스로 정당화시켰다. 나도 양심이 있어 맹세코 카톡 내용까지는 보지 않고 어떤 애들이랑 친한지만 파악했다.
그러다 사건이 발생했다. 아이가 휴대폰을 두고 학원에 갔는데 갑자기 아이 휴대폰에서 카톡이 오면서 미리 보기 창에 쓱 지나가는 거다. 정말 내용을 보려고 본 게 아니라 욕이 쓱 지나가길래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아서 금기의 카톡 창을 열어버렸다. 그리고 친구가 한 욕을 본 순간 이성을 잃고 친구라도 서로 욕은 안 썼으면 좋겠다는 내용으로 내가 답을 써버렸다. 뭔가 나쁜 아이가 우리 아이에게 욕을 하는 거처럼 느껴져서 안 되는 행동인 줄 알면서 해버렸다.
아이가 학원에서 돌아올 시간이 되자 나도 초조했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카톡을 본 건 나 자신한테 물어도 후회 없는 일인데 아이의 친구에게 내가 답을 한 건 정말 지울 수 없는 오점이었다. 역시나 집에 오자마자 휴대폰부터 손에 쥐었다. 카톡을 열어보는 순간 아이는 그냥 미친 아이처럼 오열했다. 10년 넘게 아이를 키우면서 이렇게 분노하는 걸 처음 봐서 살짝 두려움도 느껴졌다. 정말 거짓말 안 하고 한 시간 넘게 울며 소리 지르며 나에게 분노를 표출했다.
지금 생각해도 머리가 띵하다. 사실 그때 느꼈다. 내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말이다. 결국 난 나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끊임없이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지만 아이는 결국 사과를 받아주지 않았다. 다음부터 또 나의 물건에 손을 대면 엄마에 대한 믿음은 산산이 부서진다고 말하곤 그 사건은 끝이 났다.
결국 아침밥도 먹지 않고 학교 종이에 댓글을 자신의 것으로 고치곤 말없이 가방 메고 학교에 가버렸다. 난 회사에 출근해서도 자꾸 신경이 쓰였다. 아이가 한 말을 곱씹어 봐도 다 맞는 말이라 미안한 마음이 확 들었다. 아무리 내가 잘못 이해했더라도 물어보고 해야 하는 건데 내 맘대로 하는 건 잘못한 일이 분명하다.
이제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어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걸 내가 자꾸 간과한다. 아이도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데 부모라 아이처럼만 생각해서 보호에만 집착했다. 그게 아이에겐 지나친 간섭으로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이번 기회를 통해서 아이의 의사를 존중하고 아이 물건에는 아이 허락 없이 절대 손대지 말아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퇴근하고 집에서 아이를 마주했을 때 아이는 아침의 일을 잊은 듯 행동했다. 그래도 나는 아이에게 다가가 정중히 아침의 일을 사과했고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도록 꼭 물어보고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나에게 믿음을 회복할 기회를 달라고 말했고 아이도 나에게 가족이니깐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이렇게 잃어버린 나의 믿음을 회복할 기회를 얻고 하루가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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