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vs 갱년기
요즘 아이들의 사춘기가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한다더니 5학년이 되자 부쩍 짜증이 늘고 피곤해하고 목소리도 커졌다. 6학년이 된 지금은 하루하루가 전쟁이다. 더욱이 내년엔 아빠 따라 미국에서 중학교 1년을 다녀야 한다.
그래서 영어를 배워가야 하는 큰 숙제가 생겼다. 물론 영어학원을 다니고 있지만 한국 입시에 맞춘 학원이라 아이에게 필요한 회화 수업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미국 현지 선생님과 화상 영어를 신청해서 시작하고 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그 답답함을 겪어 본 나는 요즘 들어 아이의 영어 공부에 압박을 가하고 있다. 문득 이렇게 압박을 가하는 게 잘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긴 하지만 미국에서 말을 하고 알아듣고 하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아이의 의사와 상관없이 진행된 미국행이라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은 있다.
그래도 긴 시간 동안 우리가 미국에 가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주었고 아이도 다른 나라의 경험이 인생에 큰 도움이 된다는 걸 동의했다.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가 됐고 해야 하는 걸 아는데 그게 실천으로 옮기기가 싶지 않은 듯 했다.
드디어 곪았던 사건이 터졌다. 아이는 1주일에 두 번 화상영어 수업을 진행한다. 선생님의 배려로 미국에 적응하기 위해 쓰기 숙제를 내주시고 아이와 함께 수정작업도 해주신다. 그 수업이 진행되려면 아이가 주제에 맞게 수업 전에 쓰기 숙제를 완성해야 한다. 이것이 아이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로 작용하는 거 같았다.
한글로 주제에 맞게 내용을 정하고 영어로 써서 제출해야 한다. 아이는 영어로 쓰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한글로 주제에 맞는 내용을 구상하는 게 어렵다고 했다. 컴퓨터 앞에 앉아 꾸준히 써야 하지만 유튜브 보고 뒹굴뒹굴하면서 시간을 훌쩍 넘겨 버렸다. 난 화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때 아이가 갑자기 나에게 다가와 덥썩 안겼다. 근데 갑자기 아이가 너무 무거워 나도 모르게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순간 내 입에서는 “너 너무 두껍고 무거워.”라고 말해 버렸다. 앗! 사춘기 아이에게 해서는 안 되는 신체 지적 발언을 해버린 거다.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아이는 방문을 쾅 닫고 자기 방으로 가버렸다. 나도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였는데 순간적으로 욱해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방문을 살짝 열어보니 바닥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 이불을 젖히자 눈물이 가득한 분노에 찬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속사포처럼 나에게 쏘아붙였다.
“엄마는 엄마보고 몸이 두껍고 무겁다고 놀리면 어떨 거 같아? 나 사춘기 아이야. 그리고 영어 쓰기도 하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생각이 잘 안 나서 그런 거야. 내 마음도 모르면서 왜 그래. 좀 그냥 안아달라 할 때 좀 안아주고 다독여주면 더 잘 했을 거야. 엄마 미워. 나가.”
그 말을 듣고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정신이 확 들었다. 사실 내가 부끄러웠다. 나도 이유가 있었지만 아이도 이유가 있었다. 그냥 안아달라고 할 때 조금 무겁더라도 내색하지 않고 꼭 안아주면서 힘들지? 라고만 했어도 이렇게 서로 감정 상하는 일은 없었을 건데 속상했다. 그렇게 울며 아이는 잠들어버렸다.
밤에 누웠는데 잠이 오질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가 한 말이 틀린 말이 없고 내가 마음이 좁았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아이가 잘 먹는 아침을 준비하고 편지 한 통을 썼다. 어떤 상황이든 내가 외모에 민감한 사춘기 아이에게 신체를 가지고 놀린 것은 어른으로서 잘못한 일이고 공부도 본인이 원할 때 해야 하는데 숙제해야 한다는 것에만 집중해 압박준 것도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리고 다음엔 아이가 필요할 때 말없이 꼭 안아줄 거고 공부도 서로 대화해서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다. 이런 내용의 편지를 아침상 위에 써 놓고 난 출근을 했다. 저녁에 집에 돌아가니 아이가 문 앞에 마중 나와 있었다. 아이는 들어오는 나를 꼭 안아주며 말했다.
“엄마, 나도 내가 화가 왜 나는지 모르겠는데 작은 일에도 욱하게 돼. 아마 사춘기 호르몬 때문인가 봐. 엄마가 이해해줘. 사랑해.”
나도 꼭 안아주면서 말했다.
“엄마도 작은 일에 화나고 욱해. 아마 갱년기가 오려나 봐. 사춘기보다 갱년기가 더 무섭다고 하던데.”
우리 둘은 얼굴을 마주 보며 크게 웃었다. 앞으로 갱년기 엄마와 사춘기 딸의 전쟁이 어떻게 펼쳐질지 두려우면서 기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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