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생활 최대의 난관
분노의 단소
단소의 저주는 작년부터 시작되었다. 5학년 때 단소 불기가 음악 수행평가였다. 그때도 아이 반 친구들이 다들 단소를 너무 불기 어려워해서 음악 선생님이 수행평가를 노래 부르기로 변경해 주셨다고 했다. 그 일로 아이들에게 음악 선생님은 정말 착하신 선생님으로 불렸다.
아이는 피아노도 잘 치고 리코더도 곧잘 부는 음악엔 항상 자신 있는 아이였다. 그런데 단소라는 벽에 부딪혀 2년째 고전 중이다. 6학년 음악 시간 수행평가가 하필 또 소리내기 까다로운 단소이다. 단소는 초등학생이 제일 스트레스 받는 악기로 유명하다.
단소는 소리내기가 사람에 따라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한 악기이다. 설명서에 보면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아서 취구를 아랫입술에 갖다 대고 입 모양을 ‘애~’를 유지하고 단소는 45도 각도 유지, 윗입술을 아래로 내리고 후하고 불면 소리가 난다고 적혀 있다.
내가 단소를 설명서대로 불어 보니 바로 소리가 났다. 그런데 아이는 정말 거짓말 안 보태고 며칠 밤낮으로 연습해도 바람 소리만 났다. 옆에서 보기가 안타까울 정도로 소리가 안 났다. 아이는 단소를 불다 뜻대로 안 되자 화를 내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연습했다.
드디어 내일은 단소 최종 수행평가 날이다. 지금 시간은 밤 11시다. 아이 얼굴은 울먹울먹하며 거의 울기 직전이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게 너무 속상하다고 했다. 유튜브에 단소 소리내기 편도 같이 보고 내가 알려주고 해도 도무지 소리가 나지 않았다.
신랑이 옆에서 힘겹게 단소 연습 중인 우리를 보더니 왜 아이가 단소에 소리를 못내는 지 알겠다고 했다. “엄마 입술을 잘 봐. 아랫입술이 엄청 두껍지. 단소에서 소리가 나려면 단소 구멍을 아랫입술로 다 막아야 하는데 엄마는 아랫입술이 태생적으로 두꺼워서 갖다 대기만 해도 구멍이 다 막혀. 넌 입술이 작고 예쁘게 생겨서 단소 구멍을 다 막을 수가 없는 구조야.
그래서 바람이 새서 그런 거야. 엄마처럼 단소 잘 불고 두꺼운 입술 가지고 평생 조금 못생기게 살래? 수행평가 잠깐 할 때 단소 못 불고 너처럼 예쁜 입술 가지고 평생 예쁘게 살래?” 이렇게 말하곤 신랑은 아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이는 속상해서 울먹울먹하다가 갑자기 씩 웃었다. 순간 난 기분이 나빴지만 아이가 웃는 걸 보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진짜네. 엄마 아랫입술이 왜 이렇게 두꺼워? 엄마 단소 비밀이 이 두꺼운 아랫입술이었네. 난 단소도 잘 불고 싶지만 엄마처럼 아랫입술이 두꺼운 건 싫어.
그래도 아빠 말 들으니깐 내가 단소 좀 못 불어도 괜찮을 거 같다는 생각이 좀 들긴 해. 난 정말 두꺼운 입술은 싫거든.” 내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아이가 말했다. 아이는 조금 더 연습하곤 포기하고 잠이 들었다.
신랑이 아이가 잠들고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이의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서 너를 저격하며 아이 마음을 달래줄 수밖에 없었어. 넌 어른이니깐 이해하지?" 사실 알고는 있었지만 따로 이렇게 얘기를 안 해줬으면 마음 다칠 뻔했다. 내 아랫입술이 얼마나 이쁜데 말이다.
다음 날 학교 수행평가 때에도 결국에 아이는 단소를 불지 못했다. 그리고 아이는 생각보다 단소를 못 부는 친구가 많아서 덜 속상했고 유심히 친구들을 살펴보니 정말 아빠 말대로 아랫입술이 두꺼운 친구들이 단소를 쉽게 불더라며 나의 아랫입술을 쳐다보며 씩 웃었다. 난 속으로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아이가 좌절을 해본 적이 별로 없다. 어떤 일이든 마음먹으면 끝까지 다 해내고 그만큼 성과도 따랐다. 그래서 어떤 일은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고 그런 일을 만났을 때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근데 아이는 이번 단소 사건으로 모든 일이 내가 생각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빠의 센스 있는 엄마 저격으로 아이의 마음이 다치지 않게 재치 있게 포기하는 법도 배워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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