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학교에서
새로운 학년을 시작하면 어떨까?
한국에서는 3월에 새 학년 새 학기를 시작하는 반면에 미국에서는 8월에 새로운 학년이 시작된다. 아이가 6학년을 마치고 7학년으로 올라가는 새 학기가 되니 설레기도 하고 학교 공부가 어려워진다고 들어서 걱정도 되는 듯 보였다. 더욱이 새로운 언어인 스페인어를 배우게 되었고 수학도 다소 높은 레벨의 수업이 배정되어 6학년 때와는 달리 수업이 조금 타이트해졌다.
이런 아이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단 20분의 점심시간에 대한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처음 미국 왔을 때보다 요리 솜씨도 늘었고 예쁜 음식 먹는 걸 좋아하는 아이에게 맞게 나름 노력하면서 도시락을 싸서 보냈다. 그래서인지 아이가 요즘은 도시락도 싹 비워오고 투정 없이 학교를 잘 다니는 것 같아 정말 고마웠다.
오픈 하우스 날
한여름인 8월에 미국 중학교는 첫 학기가 시작된다. 오늘은 이틀 후면 개학이라 학교 오픈하우스가 열리는 날이다. 미국 학교 오픈 하우스 날은 어떤지 궁금해서 기대되었다. 저녁 7시에 시작이었는데 10분 정도 늦어 서둘러 강당으로 갔다. 이미 강당은 많은 학부모와 아이들로 꽉 메워져 있었다. 우리가 들어섰을 때는 선택과목 선생님들의 소개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아이는 자신이 선택과목으로 6학년 때 들었던 밴드 선생님을 보고는 무척 반가워했다. 새로 신청한 스페인어 선생님 소개를 할 때는 귀를 쫑긋 세우고 열심히 듣는 것 같았다. 아마 기대 반 걱정 반인 듯 보였다. 선택과목 선생님 소개가 끝나고 학년 팀마다 도서관, 카페테리아, 체육관 등으로 장소를 나누어주고 아이들과 함께 이동하라고 안내되었다. 우린 챔피언팀이라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그곳에선 그 팀의 각 교과목을 맡은 선생님들이 각자 자신의 소개와 교과목에 대한 설명을 간단히 해주셨다. 그런 다음 짧은 질의응답 시간을 가지고 오픈하우스 행사는 생각보다 일찍 마무리되었다. 아이는 같은 팀에서 아는 친구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아이는 금방 친구를 찾았다. 친구들과 시간표를 열심히 맞춰보고는 이내 속상함을 감추지 못했다. 같은 팀이라도 선택과목이 다르고 수업 레벨이 달라 똑같은 수업 시간을 가지기가 어려웠다. 마치 대학교에서 수강 신청을 해서 듣는 것과 비슷한 시스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 터라 방학 동안 안부 등 서로 궁금한 걸 물어본다고 시간이 꽤 지나 우리에게 왔다. 우린 받은 수업 시간표를 다시 확인하고 새로운 교과목 교실 위치를 알아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유독 스페인어 수업하는 곳이 학교 건물 바깥에 있었다. 미리 학교에 와서 교실 위치를 확인하고 나니 마음이 좀 편해진 거 같았다.
내가 미국 학교 오픈 하우스 날을 처음 가보고 한국 학교의 오리엔테이션과 다르다고 느낀 점이 있었다. 한국에선 학교에 갈 때 나도 그랬듯 대부분의 부모님이 옷도 차려입고 신경 써서 오게 된다. 그런데 여기 학부모들은 그냥 다 반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평소 집에 있다 바로 온 것처럼 소탈한 모습으로 다들 왔다. 그게 참 보기 좋았다.
그리고 기대했건 것과 달리 오픈하우스 행사는 학교를 둘러볼 수 있고 나의 교과 선생님을 미리 만날 수 있다는 것 말고는 특별한 것 없이 아주 짧은 시간에 끝이 났다. 사실 오픈하우스 날이라고 해서 학교에서 이것저것 많은 것을 알려주고 보여주고 할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참 간단한 행사였다.
개학 첫날
개학 첫날이 되기 전 밤에 아이는 잠을 설쳤다. 아마 기대 반 걱정 반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잠을 설치고 개학 첫날 스쿨버스를 타고 학교에 갔다. 하교 시간이 다 되어가니 아이의 오늘 하루가 궁금했다. 집에 들어온 아이의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난 조심스럽게 개학 첫날이 어땠는지 물으니 아이가 답해주었다.
“엄마, 방학이 길었잖아. 오랜만에 학교 가니깐 긴장도 되고 낯설기도 했어. 아이들의 키도 많이 자라 친한 친구인데도 청음엔 못 알아보겠더라. 또 7학년에 올라가니 수업 분위기가 조금은 타이트해진 느낌이었어.
그리고 내가 선택과목으로 스페인어를 택한 게 좀 후회됐어. 선택과목으로 스페인어를 신청할 당시에는 학교에 스페인어 쓰는 친구들도 많고 스페인 여행을 갔을 때도 도움 될 거 같아 신청했거든. 그런데 친구들이 대부분 art 수업이 배정되어서 친구들과 시간표가 달라 혼자 수업을 들어야 해. 친한 친구 없이 수업 들어야 해서 너무 싫었어.”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자 아이가 갑자기 흥분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내일이 오는 게 싫어. 그래서 안 자고 싶어. 학교 가기가 너무 싫어. 6학년 때는 오전 시간에 집중 과목을 수업하고 오후에 밴드 수업도 있고 해서 하루가 잘 갔어. 근데 7학년은 에너지가 있는 오전에 밴드나 스페인어같이 편안한 수업이 있고 오후에 집중 과목 수업이 있어 하루가 너무 힘들다는 느낌이 많이 들어.
엄마 오늘 진짜 마지막 수업을 하고 교실을 나오는데 내가 어떤 감정이 들었는 줄 알아? 정말 해방감이랄까? 뭔가에 갇혀 있다 풀려난 느낌이었어. 마지막 교실 수업을 마치고 나올 때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어. 그게 오늘 내 마음이었어. 학교 가기 너무 싫어.”
우리도 긴 방학이 지나고 학교에 갈 때 엄청나게 가기 싫었던 기억이 있다. 아마 아이도 첫날이라 그런 것 같아서 나아질 거라고 얘기해 주었다. 학교는 어차피 가야 하는 거고 다닐 거면 거기서 즐거운 일을 찾아보라고 말해주었다. 새로운 친구에게 먼저 다가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알려주었다. 일단 한번 흥밋거리를 찾아보겠다고 말한 뒤 침묵으로 안 자고 버티다 늦은 시간 잠이 든 게 개학 첫날이었다.
다음 날 아침 아이는 여전히 학교 가기 싫다는 노래를 부르며 학교에 갔다. 오후가 되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이의 표정이 사뭇 어제와 달랐다. 뭔가 분위기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엄마, 나 오늘 발표했어. 선생님이 질문했는데 난 알겠는데 아무도 손을 안 드는 거야. 그래서 진짜 고민하다 손을 번쩍 들고 답했는데 선생님께서 답이 맞다고 칠판에 적으셔서 기분이 너무 좋았어. 뭔가 내가 뿌듯했어.
그리고 과학 시간에 두 명씩 짝지어 수업하는데 옆에 친구가 금발에 키가 나보다 훨씬 큰 그런 애였거든. 처음엔 너무 키가 커서 거부감이 있었어. 어른 같은 느낌이 있었거든. 그런데 그 아이가 말하는데 완전 중학생인 거야. 약간 어리숙하기도 한 것 같았어. 그래서 오늘 말도 많이 하고 새로운 친구가 생긴 것 같아 기분이 너무 좋았어.
엄마 말대로 어차피 가야 하는 학교니깐 새로운 친구 사귀어도 보고 재밌는 것도 찾아보도록 노력하니깐 한결 많이 나아졌어. 뭐든 생각을 바꾸니깐 답이 보였어.”
난 아이의 말이 끝나는 순간 깨달았다. 아이들은 해결책을 주지 않아도 대화를 통해 길잡이만 되어주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기특한 방법으로 세상에 잘 적응해 간다는 사실을 말이다.
유혹을 이긴 날
아이와 자려고 누웠는데 아이가 갑자기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 중에 자랑할 게 있다고 했다. 나는 궁금해 귀를 쫑긋 세웠다. 아이는 누워서 있었던 얘기를 천천히 풀어나갔다.
“엄마, 한국에서 국어에 해당하는 language art 시간이 있는데 선생님이 갑자기 예고 없이 어려운 시험을 치는 거야. 애들은 모두 당황했었어. 그도 그럴 것이 시험 문제를 보는 순간 나도 놀랐거든. 예를 들어 한 지문에 12문제 푸는데 영어 한 지문이 5장이 훨씬 넘었어. 말이 안 되는 분량이거든.
내 옆에 앉은 한 태국 아이가 자신은 영어를 잘하지 못해서 번역기 써도 되냐고 물었는데 선생님이 가능하다고 하셨어. 사실 나도 쉽게 번역기를 쓰고 싶은 유혹도 있었어. 그런데 난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 보고 싶은 거야. 어차피 한국 가면 공부해야 하는데 미리 지문 읽는 연습이 필요하단 생각도 들었거든.
그래서 번역기 안 쓰고 쭉 읽어 나갔어. 근데 생각보다 이해가 되는 거야. 사실 지문이 어렵진 않았어. 문제는 너무나 긴 지문이라 읽고 문제를 푸는데 내용이 가물가물한 거야. 정신을 집중하고 열심히 풀었어. 그런데 딱 한 문제가 말장난해 놓았는데 내가 그걸 이해가 안 되는 거야. 한국말로 번역해도 난 잘 이해가 안 됐어.
글 내용이 세계에는 수많은 언어가 존재하는데 소멸하는 언어도 있다는 내용이었어. 그런데 문제가 언어가 위험해지기 전이라는 표현이 있었는데 언어는 위험할 때 소멸하는데 위험해지기 전이니깐 언어가 사라지기 직전이 정답이었어. 이 문제는 나뿐만 아니라 우리 교실의 모든 아이가 틀렸던 문제거든.
그때 난 생각했어. 국어가 어려운 과목이구나. 뉴스에서 요즘 아이들이 문해력이 부족하다는 말 많이 들었는데 그게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여하튼 그래서 엄마 중요한 건 내가 12문제에서 유일하게 1개 틀린 아이가 된 거란 거지. 다른 친구들은 영어가 모국어인데도 제일 잘한 애가 9개 맞았거든.
오해는 하지 마. 내가 문제를 많이 맞아서 기쁜 게 아니라 내가 번역기의 유혹을 이겨내고 차근차근 지문을 읽어나가서 이해하고 문제를 풀었다는 사실이 너무 자랑스러워. 엄마한테 집에 오자마자 자랑하려고 했는데 잊어버리고 있다가 자려고 누우니 생각나서 얘기하는 거야. 나 좀 잘했지?"
아이는 뿌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얼마 전까지 학교 가기 싫다고 하던 아이가 어느새 학교에 다시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내심 안심되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을 시험해 보고 번역기 유혹도 이겨내 보고 하는 모습도 대견했다. 매일 어리게만 보여서 걱정이 많았는데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아이는 훨씬 학교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사춘기의 진심
사춘기인 아이가 내뱉는 말은 나를 아프게 한다. 나의 이때까지의 노력을 0으로 만들어버리는 수많은 가시 같은 말들을 들으면 나도 사람인지라 심지가 흔들린다. 그때마다 이 말은 이 아이의 진심이 아니다. 사춘기 호르몬의 장난이라고 마음속으로 외치며 버텨본다. 하지만 한 번씩 가슴 깊이 박히는 커다란 가시는 잘 뽑혀 나가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일로 다투고 서로의 감정을 소모하는 일이 있었다. 그날은 휴일 아침부터 휴대폰을 잡고 반나절을 유튜브만 보면서 보내고 있었다. 원래 원칙은 정해진 휴대폰 인터넷 사용 시간에만 할 수 있게 되어있다. 그런데 한날 아이가 불만을 토로하며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휴일만이라도 휴대폰 시간제한을 풀어주면 자기가 시간 조정해서 보고 내가 화날 정도로는 절대 안 볼 거라고 했다.
이제 중학생이니 아이도 스스로 제어하는 연습도 필요할 것 같아 휴일 시간 제안 해지 요청을 받아들였다. 다만 너무 무분별하게 빠져본다면 원래 원칙으로 복귀 조건으로 수락했다. 왜냐면 아이는 믿지만 중독성 강한 유튜브나 웹툰의 유혹은 엄청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이는 약속과 달리 주말이 되면 아침부터 일어나 방에 틀어박혀 반나절 이상을 유튜브에 심취하며 보냈다. 난 그걸 지켜보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아이에게 스스로는 조절이 안 되는 걸 너도 알았으니 약속대로 시간제한이 있던 때로 돌리겠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아이는 정말 감정이 격해져 난리를 쳤다. 사춘기구나! 느낄 정도로 울며불며 휴대폰 사수에 열을 올렸다.
정말 내가 지쳐 나가떨어질 정도로 엄청난 반항을 했다. 결국 난 엄청난 감정 소모를 하고 집을 나와버렸다. 난 화가 나면 그 자리를 나와 걸으려고 노력한다. 무작정 걷다 보면 감정도 가라앉고 생각도 정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다투다 소중한 하루를 통째로 날려 먹는다는 사실이 너무 속상했다.
한참을 걷고 집으로 돌아와 일부러 아이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아이 스스로 행동에 대해 생각해 보고 반성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우린 아무 말 없이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는 누운 채로 슬그머니 내 손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엄마, 나도 노력하는데 모든 게 조절이 안 돼. 입에서 나쁜 말들이 나올 때가 있어.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선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거든. 근데 나도 나를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럴 시기인가 봐. 뭔가 주체할 수 없이 화가 나고 그게 제어가 안 돼. 사실 나도 엄마에게 화내고 나쁜 말 하고 방에 들어가면 내가 왜 그랬을까 자책하게 되는 거 엄만 모를 거야. 이렇게 내 마음을 얘기하는 건 엄마가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에서 말하는 거야. "
이 말을 듣는데 난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뭔가 뭉클한 느낌도 들었다. 사춘기 아이가 전하는 진심이 내가 여태까지 섭섭했던 마음이 한 번에 눈 녹듯 사라지는 듯했다. 아마도 내일 또 싸우고 화해하고 반복할 테지만 그래도 사춘기라는 이 시기 이 호르몬의 장난 때문이라는 나의 믿음은 틀리지 않았기에 난 매일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완전 괜찮은 날
스쿨버스에서 내려 친구와 걸어오는 아이가 보였다. 뭔가 기분이 좋은 듯했다. 그래도 먼저 말하기 전에 묻지 않기로 하고 아이를 반갑게 맞았다. 아이는 요새 먹어도 자꾸 배가 고프다며 집에 오자마자 간식을 찾았다. 아이가 좋아하는 과일과 스낵을 주었더니 거의 흡입했다. 배가 부른 아이는 나보고 식탁에 앉아 보라고 했다.
"엄마, 나 오늘 진짜 뿌듯한 하루였어. 그거 알지. 내가 생각해도 오늘 완전 괜찮은 날이었다. 이런 날 말이야. 자 들어봐. 오늘 첫 수업 시간부터 좋았어. math 시간에 내가 문제를 풀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나의 이름을 부르시는 거야. 칠판에 있는 문제의 답을 말해보라는 거야. 그래서 답을 말했지. 당연히 정답을 난 말했지.
그제야 선생님께서 고개를 끄덕이시며 마음 속이야기를 하시는 거야. 알고 보니 선생님께서 나를 지켜보셨는데 다른 아이들은 지저분하게 막 뭘 풀고 있는데 내가 가만히 앉아 있으니깐 내가 몰라서 문제를 안 풀고 있었다고 생각하셨데. 사실 난 문제가 안 어려워 그냥 풀면 되었거든. 그래서 기분이 엄청 좋았어.
또 문제 푸는 시간에 일본인 친구가 다가와서 자기가 푼 문제의 오류를 좀 찾아달라고 하더라. 그래서 풀이 과정을 살펴보니 +, - 기호를 바꿔서 문제를 풀어서 답이 안 나온 거였어. 내가 바로 말해줬지. 그랬더니 엄청나게 멋진 눈빛으로 나를 보는 거야. 그리고 그 아이가 내가 수학 문제 풀 때 식만 적어나가는 걸 보고 나보고 AI 같다고 말했어. 그때 기분이 너무 좋았어.
그뿐 아니라 과학 시간이 대박이었어. 과학은 실험을 통해서 데이터를 만들어 나가는 수업이라 선생님 설명을 잘못 알아들으면 하기가 어렵거든. 그래서 항상 긴장하며 들어. 근데 오늘 선생님께서 어떤 실험을 여러 번 해서 데이터를 뽑아내고 그걸 그래프로 완성까지 해야 하는 작업이었어.
나도 하면서 열심히 했지만 내가 끝까지 이걸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거든. 옆에 외국인 친구들도 대부분 결과를 도출하지 못했어. 그런데 내가 마지막 단계 그래프까지 완벽하게 해낸 거야. 무려 선생님의 영어설명을 아주 잘 알아듣고 말이야. 이건 진짜 엄마한테 자랑하고 싶었어. 나 자신이 뿌듯했거든.
그리고 놀라지 마. 나 스페인어 시간에 숫자 1부터 10까지 벌써 다 외웠다. 우리가 스페인 여행을 갈 거니깐 알게 모르게 내가 스페인어를 좀 더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수업 열심히 듣고 있어. 다만 스페인어가 여성, 남성에 대한 단어가 따로 있어서 그게 좀 힘들더라. 그래도 열심히 배워볼게. 엄마는 스페인어 모르니깐 내가 여행 가서 한번 해볼게. 나만 믿어."
그 조그마한 입으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자랑 행진은 한참 지나서야 끝이 났다. 말을 끝내고 아이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뭔가 자신감으로 무장한 느낌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교 가기 싫다던 아이가 초롱초롱한 눈빛을 가진 학구열에 갈망하는 아이처럼 보였다.
내심 개학하고 한참을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해서 걱정이 많았는데 나름의 노력으로 배워가고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보니 너무 대견했다. 학교에서 혼자 부딪히고 노력하며 스스로 자라고 있는 아이가 참 고마웠다.
20개의 이메일
아이한테 학교에서 가장 재밌고 기대되는 수업 시간이 언제냐고 물었을 때 아이는 주저 없이 밴드 수업 시간이라고 대답한다. 만약 밴드 수업이 없었다면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을 거란 아이의 대답이 아직도 기억난다. 같은 밴드부 아이의 친구가 집에 놀러 왔을 때도 역시나 같은 대답을 했었다. 그만큼 아이들에게 중요한 수업 시간인 걸 알고 있었다.
아이의 애착이 가득한 밴드부의 새 학기가 시작되자 밴드부에서 기부 행사를 한다고 안내장이 왔다. 보통 아이는 학교에서 오는 안내장을 나에게 잘 주지 않는다. 자기가 보고 이건 안 해도 될 거 같다고 생각하는 건 아예 말도 꺼내지 않던 아이였다. 그런데 이 밴드부 기부 안내장은 학교에 다녀오자마자 우리에게 주면서 꼭 했으면 한다고 의사를 확실히 밝혔다.
우린 안내장을 살펴보았다. 먼저 1주일 안에 기부받을 자신의 프로필을 등록해야 하고 사진은 악기를 든 사진을 권장했다. 그리고 아이에게 기부할 가능성이 있는 이메일 20개를 등록하라고 적혀있었다. 아이가 모처럼 부탁한 거라 우린 꼭 이메일 20개를 채우고 싶었다.
그런데 이곳에 이메일을 등록한 사람에겐 아이의 밴드부에 기부하라는 안내 링크가 갈 테고 그걸 부담스러워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선뜻 주변 친구에게 부탁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우린 가족 찬스와 우리가 가진 이메일을 총동원해 20개의 이메일을 채웠다.
기부는 한 달 동안 진행되고 기부금을 많이 받은 아이에게는 상품과 인센티브가 주어진다고 했다. 이메일 등록이 마감되는 날 학교에서 아이는 20개의 메일을 다 채워서 상품으로 과자를 받아왔다. 작은 과자지만 아이는 굉장히 기뻐하며 맛있게 먹었다. 과자를 다 받는 게 아니라 진짜 이메일을 다 채운 애들에게만 과자를 주었다고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기부명단 이메일을 다 채웠다며 자신도 다 채워서 기쁘다고 했다.
얼마 후 메일로 아이의 프로필 사진과 함께 기부해 달라는 링크가 도착했다. 내 아이가 있는 밴드부에 기부한다고 생각하니 돈을 내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자연스레 일상에 기부를 접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그것 또한 마음에 들었다.
사실 우리에게 기부란 게 뭔가 큰 결심을 해서 하는 것처럼 느껴졌었는데 여기 아이들은 기부가 그냥 일상이 되어 있었다. 학기 초에 필요한 학용품, 아이들 간식 등을 기부받는 것도 여기 와서 처음 해 본 것들이었다. 이곳에 와서 다양한 경험을 했지만 기부가 큰마음을 먹어야 하는 게 아닌 일상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란 걸 새삼 느끼게 되었다.
두 가지 이야기
밤에 자려고 아이랑 누웠는데 그날따라 잠이 잘 오지 않는다며 요즘 며칠간 학교에서 있었던 특별한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했다. 할 얘기가 아주 많지만 오늘은 자야 하니 두 가지 얘기만 해줄 거라고 하며 말을 이어갔다.
"엄마, 요즘 학교에 다이내믹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데 그중 첫 번째 이야기야. 얼마 전에 점심 먹을 때 자리 배치에 대해 말해줬던 거 기억나? 왜 과학 시간에 내 짝꿍이었던 애가 내 앞에 매일 앉는다고 했잖아. 그 친구 옆에 제임스라는 키가 아주 큰 단짝 친구가 있어. 둘이 항상 점심시간에 같이 앉아서 얘기하거든. 근데 어제 제임스가 엄청나게 멋진 아이처럼 보이는 사건이 있었어.
우리 학년에 마음이 아주 조금 덜 자란 아이가 있는데 키도 아주 작고 체구도 왜소하거든. 근데 며칠 전 점심시간에 몇몇 아이들이 그 아이를 놀렸어. 그걸 지켜보았던 제임스가 다음 점심시간부터 놀림받던 그 아이를 자기 옆에 앉히고 같이 즐겁게 얘기도 하고 친구가 되어 준 거야.
난 이때까지 그런 애를 본 적이 없어서 갑자기 제임스에게 그런 면이 있다는 게 놀랍기도 했고 멋져 보이기도 했어. 사실 제임스뿐만 아니라 여기 대부분의 아이들이 중학생인데도 아주 착해. 한국에서 상상했던 것과 여기 생활하며 직접 느낀 아이들의 모습이 진짜 많이 달라. 어떤 사람이든 어떤 환경이든 미리 판단하는 게 아니라 내가 직접 경험해 보고 판단하는 게 옳다는 생각이 요즘 많이 들어.
두 번째는 조금 심각한 이야기야. 그리고 복잡해. 시험을 치고 있는 시간이었어.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선생님이 엄청나게 화난 목소리로 세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일어나라고 소리치셨어. 평소에 온화하신 분이라 모두 깜짝 놀랐어. 처음 이름이 불린 아이가 어떤 아이 팔찌를 훔쳤다고 했어. 그리고 두 번째 이름이 불린 아이는 그 팔찌를 받아서 처음 맡았던 남자아이이고 세 번째 이름이 불린 아이는 그 팔찌를 남자아이에게서 다시 받은 두 번째 아이 짝꿍인 여자아이였어.
그래서 훔친 아이는 오피스에 불려 갔고 팔찌를 맡았던 두 명은 선생님 따라 오피스에 불려 가진 않았지만 엄청나게 혼나는 일이 있었어. 그 울었던 아이는 알고 보니 그 팔찌가 훔친 팔찌인지 몰랐던 거야. 그래서 너무 억울해서 울었다고 해. 사실 내가 생각해도 마지막에 팔찌 받은 아이는 억울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날 우리 반은 시험 중이었는데 그 사건 때문에 모든 게 엉망인 날이 되어버렸지. 여기도 물건을 훔친 일은 범죄에 해당해서 엄청나게 벌을 주고 심각하게 대처하더라. 조금 무서웠어. 그래도 이날 아이들은 물건 훔치는 게 얼마나 큰일이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란 걸 다시 한번 알게 된 날이기는 했어.”
이 두 이야기를 나에게 해주고 아이는 에너지를 많이 썼는지 바로 곯아떨어져 잠이 들었다.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니 처음 걱정했던 것과 달리 한국이나 여기나 아이들의 생활은 조금의 차이가 있을 뿐 기본적인 부분은 거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을 배려하는 아이가 있기도 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아이가 있기도 하니 말이다. 이렇게 아이가 학교 이야기를 한 번씩 해줄 때마다 어른인 나도 배우고 느끼는 게 많아지는 것 같아 아이의 이야기가 난 너무 좋다.
'미국(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국 학교 도시락 + 학교 이야기⑥] 미국에서 중학교를 다니는 아이의 사소한 일상은 어떨까? (4) | 2024.12.15 |
---|---|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여행]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세콰이어 국립공원 제너럴 셔먼 트리/요세미티 국립공원 요세미티 폭포 글레이셔 포인트 (0) | 2024.08.19 |
[미국 서부 애리조나 여행] 자연이 만든 신비의 협곡들 그랜드 캐년 국립공원/엔탈롭 캐년/홀슈밴드/Lotsa Motsa PIZZA 피자맛집추천 (0) | 2024.08.04 |
[미국 서부 와이오밍 여행] 그랑 테턴 국립공원 / 나의 인생 여행지 옐로스톤 국립공원에 가다. (0) | 2024.07.31 |
[나이아가라 폭포 여행]미국쪽 VS 캐나다쪽 어디가 더 좋을까? (3) | 2024.07.23 |